홍성, 순교자의 땅

‘신앙의 묏자리’ 별칭을 얻어

홍상수 기자 | 기사입력 2020/05/28 [19:52]

홍성, 순교자의 땅

‘신앙의 묏자리’ 별칭을 얻어

홍상수 기자 | 입력 : 2020/05/28 [19:52]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는 바다와 인접해 외국 문물 수용의 창구 역할을 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시기와 전파속도가 빨라 1700년대 신도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순교자 수는 무명의 순교자(殉敎者)까지 합해 총 1,000여 명이다. 홍주는 순교자가 212명으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다.
 
고려 초에는 홍성 일대를 ‘운주라 ’불렀고, 현종 9년 1018년에 ‘홍주’로 개칭되었다. 2018년은 ‘홍주 천년의 해’였다. 1914년에는 우리나라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홍주와 결성 지역을 합쳐 ‘홍성’이라 부르게 되어 올해 ‘홍성 106년’ 째 해다.
 
현 홍성 군청 뒤에 홍주목사(정 3품 관리)의 동헌(고을 수령(守令)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이 있다. 동헌에서는 천주교 지도자층의 신앙인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굳건히 지켜서 오히려 곤장과 주뢰형을 가해한 형리들이 녹초가 되어 혀를 내둘렀던 장소다. 이처럼 홍주 동헌은 순교한 선조들의 신앙심이 담긴 곳이다.
 
홍주 북문 밖의 황일광의 참수터는 참수형으로 피를 흘린 곳이다.
 

생매 장터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로 1866년 전국적으로 병인박해 때 신앙인 최법상, 김조이, 원 아나타시아 등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덩이를 받으면서 순교의 길을 갔던 장소다.    

 

  



홍주 감옥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가두는 시설로 조선시대는 담장을 둥그렇게 둘러 원옥이라고도 하였다. 서울에서는 형조와 한성부, 사헌부와 병조 및 승정원 등에 설치됐으며, 지방에는 행정 관청에 설치됐다. 고종 9년(1872)에 제작된 홍주 지도를 보면 홍주읍성 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확인된다.
 
감옥을 주관하던 홍주 재판소는 1895년에 설치됐으며, 1913년 홍주 재판소와 검사국이 옮겨가면서 감옥도 철거됐다. 현재 감옥은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이 추진되던 2012년 현 위치에 복원됐다.
 
원시장(베드로, 1732~1793)은 홍주 감옥에서 순교하면서 “저를 위해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이제는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바칩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포졸들이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사또가 한 겨울에 밖에 내놓고 물을 몸에 계속 부어 열려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곳 홍주 감옥은 천주교 박해 기간(1791~1869) 순교자 212명 중 113명으로 최고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곳으로 교수형이 제일 많이 자행됐다. 순교자의 옥중 생활은 굶주림과 목마름, 장독과 전염병 그리고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생명을 단축케 했다.
 
홍주 옥에서 얼어 죽은 원시장(베드로)을 시작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홍주에서 순교하여 ‘신앙의 묏자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고귀한 신앙과 정신을 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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